양동마을
대구에서 영천, 안강을 거쳐 포항으로 가는 길에 양동마을이라는 민속마을 입구를 지나게 된다.
양동마을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유래나 내용을 알고 있다.
이번에 대구은행에서 발행된 ‘향토와 문화’52호에 양동마을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자료가 수록되어 있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양동마을은 물(勿)자형 지형을 가진 마을로 고려말과 조선 개국기에 아산 장씨와 풍덕 유씨가 10여 호 거주했었고, 조선 초기(15세기)에 월성 손씨의 손소 선생이 양동 마을 유씨 집안의 무남독녀와 결혼하여 양동으로 이주해 왔고, 그 슬하에 5남 2녀를 두는데, 막내딸이 여강 이씨의 이번과 결혼하여 회재 이언적을 낳게 되어 두 성씨 집안으로 명문의 씨족마을로 번성하게 되었다.
손소는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공신이 되었고, 4대 봉사 이후에도 대대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는 국불천위(國不遷位)에 오르게 되었다.
손소의 둘째아들인 손중돈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학문적으로도 영남 성리학계의 거목이었으나, 연산군 시대에 파직 당하였다가 중종 때 상주목사로 재임한다. 그 시절 선정을 베풀어 그의 사후에 상주 사람들이 제사를 드렸을 정도였다.
승지, 참판을 거쳐 전라, 충청, 경상, 함경 4도 관찰사를 역임하여 월성 손씨 집안을 반석위에 올리게 된다.
회재 이언적은 원래 이름이 적(迪)이었으나 중종이 직접 내린 언(彦)자를 이름 중간에 넣었다.
이언적은 어릴 적 부친을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돈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으며, 24살에 과거에 급제한다.
관직 초반은 순탄하였으나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몰려 낙향하고, 양동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옥산에 독락당을 짓고 고독을 즐기는 생활을 한다. 훗날 이언적을 배향하는 옥산서원이 부근에 세워지고, 외할아버지와 같이 국불천위(國不遷位)에 오르게 된다.
월성 손씨의 종가인 서백당은 뒷산 문장봉의 정기를 받아 삼현출생지지(三賢出生之地)의 터로 알려져 있다. 손중돈과 이언적이 같은 방에서 태어났고, 한 분이 더 태어날 수 있다하여 출가한 여자는 이 방에서 출산할 수 없도록 한다고 한다.
이 두 집안이 양동마을에 같이 생활하다보니 서로간의 경쟁의식이 생겨 그 결과로 두 집안의 더 큰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는 말에 참 공감이 갔다.
가세확장의 요인은 땅과 함께 가문의 번영을 이끌 인물을 얼마나 배출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서로 선의의 경쟁을 통한 결과 양쪽 집안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영남지방의 큰 세력의 축을 이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가문은 건축물 조성에서도 서로 뒤지지 않으려고 서로 대응되는 듯한 건축물을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월성 손씨의 종가인 서백당(書百堂)과 여강 이씨의 종가인 무첨당(無忝堂)을 보기로 들 수 있겠다.
만약 어느 한 집안만 이 마을에 살았다면 이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까?
아마도 어려웠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마라톤에서도 상대선수 없이 혼자 달리게 된다면 좋은 기록을 얻기가 힘들다고 하지 않는가.
좋은 상대를 만나 적절히 스트레스도 받아가면서 열심히 노력해야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또 한번 크게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향단의 외양과 내부 모습(좌)와 마을 전체의 개략도(위)
향단은 여강 이씨 향단파의 종택.
향단이란 당호는 회재의 아우인 이언괄의 손자의 호
향단은 마을로 들어가는 큰길에서 바로 보이며 지을 당시 99칸이었고, 화려한 지붕구조를 가지고 있어 건축가들이 좋아하는 집이라 함.
※위의 내용과 사진자료는 ‘향토와 문화 52호’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습니다.